정미나(진보정의연구소 전문위원)
올 초, 정의당 천호선 대표는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비정규직 정당’임을 선언했다. “비정규직이 넘치는 사회에서 정작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정당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정의당은 ‘선언’이 아닌 ‘실천’으로 비정규직 정당으로 가겠다고 천명했다.
과연, 비정규직은 우리의 지지층인가?
정의당의 지지율은 4% 내외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850만 명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비정규직 다수가 적어도 현재는 우리 지지층이 아님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당이 표방해온 사회적 약자, 그리고 노동자들은 우리당을 지지할까? 현재 지지율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그동안 이런 현실에 직면하며, 첫째는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반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interest)에 부합하는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이른바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의 원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거짓 공약을 했던 것처럼, 그동안 수많은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향해 ’거짓말‘을 많이 하여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지역주의가 너무 강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기본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 한다는 가정이 내포돼 있다. 이에 따르면, 이 사회의 기득권을 우선시하는 새누리당의 지지층은 기득권이 될 것이고, 사회적 약자 및 노동자는 이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순리가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이런 현실 속에서 위의 가정을 고수하게 되면, 사람들의 정체성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 한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는 식의 규범적 주장으로 바뀌고 만다.
이러한 가정은 기본적으로 ‘경제학’의 기본가정과 유사하다. 사람들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진보진영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시장경제에 대한 경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을 반추해보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체성은 비단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social being)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에는 비단 경제적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변수들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당의 지지층이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대변하고자 하는 사회적 약자,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이 직접적으로 우리의 지지층이 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의 지지층은 사회적 약자 혹은 비정규직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제시하는 사회적 약자 및 비정규직의 문제에 ‘공감’하고 이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이다.
즉, 이러한 이슈가 자신들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고 이를 자신의 이해관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잠재적 지지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부자일수도, 중산층일수도, 화이트칼라일수도 있다. 한편, 경제적 상황이 사회적 약자 및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우리당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 역시 충분하다. 이들은 지역이나 안보 등의 문제를 더욱 중요시 여길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비정규직에 대한 해결방안을 경제성장이라고 생각할 경우 이들은 새누리당을 지지할 개연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지층을 확대할 수 있는가?
사람들의 정체성이 비단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보면,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비정규직의 문제를 (비정규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 및 이해관계와 연관돼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석의 틀’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에 대한 ‘정치적 담론’을 제공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개별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과 효과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정책의 필요성을 판단하고 지지 여부를 결정할 때 정치인들이 전개하는 담론에 영향을 받는다. 이를 통해 정책을 해석하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규정’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경제성장’이라는 담론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정책은 모두 ‘경제성장’을 위한 것이라는 강력한 ‘해석의 틀’을 확보하고 있다. 가령, 재벌을 위한 감세 정책을 추진할 때도 투자활성화를 통한 경제성장의 틀로 정당화한다. 이것이 사실상 재벌에 대한 특혜인지의 여부를 떠나, 국민들에게 그렇게 해석되는 틀을 갖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새누리당이 어떤 정책을 내놓든지 앞으로도 그건 분명 ‘경제성장’ 담론으로 해석될 것이다. 반면, 새정치연합의 경우 개별사안에 대해 그 어떤 일관된 담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안이 발생할 경우, 새누리당은 ‘경제성장’이라는 강력한 해석의 틀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것이라 예상되지만, 새정치연합은 ‘비판’할 것이라는 것 외에 그 어떤 일관성 있는 정책담론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당의 ‘담론’은 무엇인가? 요즘 젊은 세대를 흔히 ‘삼포세대’라고 말하곤 한다. 심지어 ‘달관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황당한 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맞는 말인 것 같다. ‘불안정’해서 무섭고, ‘불공정’해서 억울하고, ‘불가능’해서 지쳐버린 세대이다. 그 어떤 희망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차라리 ‘달관’한지도 모르겠다. 비정규직은 물론이거니와 정규직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복지국가를 원하고 노동현장에서의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정의당이 아직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오랜 기간 노동자 정당임을 표방해왔고 비정규직 정당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국가구상이 수많은 노동자들의 정체성과 이해관계와 연결되는 일관된 ‘담론’이 부재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어린이집 CCTV 설치 의무화 법안에 대해 우리당은 반대를 표명한바 있다. 이 결정은, 이 법안의 타당성 및 실효성 여부를 떠나, 우리당이 그동안 일관적으로 제기해왔던 ‘인권’의 문제로 국민들에게는 해석될 것이다. 즉, 정의당은 ‘인권’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아동폭력에 있어서도 어린이집 교사들의 인권을 우선시한다고 해석될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우리가 어린이집 아동폭력 사건에 대한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하더라도, 그동안 우리가 일관성 있게 전개해 온 ‘인권’이라는 담론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정책결정이 그러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우리는 비정규직 정당, 정의로운 복지국가 건설을 천명했다. 이것이 국민들의 정체성과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비로소 우리의 정책대안을 자신들 삶의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지금의 새누리당이 이야기하는 경제민주화 및 복지확대 등의 논의는 과거 진보진영이 했던 성과를 가져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발언일 수 있다, 비단 패배자의 회한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새누리당이 하고 있는 경제민주화나 복지정책들이 우리가 하고자 했던 것이며, 따라서 이와 차별성 있는 정책적 대안이 부재한 것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 현안이 되는 개별 사안마다 비판 및 대안을 내놓을 때,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제시하는 국가비전과 연결시켜 설명해내야 한다. 즉, 개별 이슈 마다 서로 다른 해석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국민들이 우리당의 담론을 통해 ‘정의로운 복지국가’, ‘비정규직을 위한 방안’이라는 눈으로 새롭게 정책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일관된 ‘해석의 틀’을 지속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복지국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정의당의 복지국가’, ‘정의당의 비정규직 대책’을 국민에게 전달할 수 있고, 이에 ‘공감’하는 국민들은 비로소 정의당을 자신들의 대안정당으로 고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 http://www.justicei.or.kr/290?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