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탁(진보정의연구소 부소장,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정의당 총선캠프운영위에서 2월 27일 개최한 총선캠프 워크샵에 참가하였다. 첫 번째 강의의 시작은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는 박상훈 박사가 맡았다. 개인적으로야 전혀 그렇지 않지만, 이전부터 박상훈 박사의 강연에 대한 불편한 혐의를 계속 품고 있던 터였다. 그가 가르치고 있는 막스 베버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이들을 잘못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막스 베버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해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가치중립적 학문적 태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다. 그러니 진보정치에 베버류의 접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불편한 마음을 들게 하였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비판할 수는 없다. 또 정치학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실제로 내가 불편했던 마음을 가진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내 눈에는 왜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책임윤리라는 용어 하나를 가지고 권력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듯 보이는가?’
베버가 실제로 그 면죄부를 주었는가? 아니다. 박상훈 박사가 강의한 내용을 묶은 <정치의 발견>이란 책에도 그 점은 분명히 나와 있다. 책임윤리를 위해 신념윤리를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다. 대의에 대한 신념이 없는 정치는 허무하다. 문제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조화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이 조화 불가능한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정치가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날 강의에서 박상훈 박사는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절대 만만한 책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스스로도 20번 정도를 읽어서 이해하기 시작했던 책으로 소개하였다. 그러니 베버를 책 한 번 읽는 것으로, 강의 한 번 듣는 것으로 어설피 이해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위험한 책인가? 차라리 소개하지 말아야 했던 것이 아닌가? 그게 내가 불편했던 이유다.
하지만 육성으로 강의를 들으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마음이 후련해졌다고 하는 것이 무슨 고민거리를 해결해 줬다는 말이 아니다. 화해 불가능한 것을 현실에서 풀어나가야 하는, 천국은커녕 지옥에나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인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내 우울한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대학생활 이후 줄곧 운동을 해 왔다. 학생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그리고 정치운동이든. 즉 나에게 정치는 운동으로서의 정치였다. 노동운동을 한 나에게 정치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수단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지역에서의 선거출마가 나의 주된 경력이 된 이후에도, 언제나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라는 비극적 낙관주의로 스스로를 지탱해 왔다. 주위의 냉소와 의구심은 해결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냥 안고 가야할 숙명으로 여겼다.
내가 정치를 다시 보기 시작 한 것은 최근이다. 계기적 사건을 대기는 쉽지 않으나, 굳이 이야기 하자면 진보신당을 탈당하는 문제에 대한 지독한 고민과 방황을 하던 시기 이후다(굳이 하나 더 보태자면 민주노동당을 탈당할 때의 심정은 제대로 된 운동정치를 해 보자는 것이었다). 권력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영향력으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통치성으로서 권력을 보게 되었다. 전자의 권력은 약하고 강함의 차이가 있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에 존재한다. 존재 자체에 권력이 포함되어 있다. 젓 먹이 아이가 우는 것도 권력의 표현이다. 헐벗고 굶주린 노숙자도 그들에 대한 정책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향력을 가졌다고 통치하는 것은 아니다. 통치성으로서의 권력은 정치가가 가져야 한다.
정치가는 바로 그러한 권력을 마주보고 있어야 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니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다. 마주보되 흡수되지 않는, 취하되 빠지지 않는 긴장을 정치가는 가져야 한다. 이제 나에게 정치는 더 이상 운동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다. 지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현실에서 한 발짝, 아니 반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혹시 아는가,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몇 백 발자국을 내딛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내가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를 현실정치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애당초 현실이 아닌 정치는 없다. 설령 변혁의 정치나, 운동의 정치라고 해도 스스로 몽상가라고 취급하지 않는 다음에야 현실이 아닌 정치는 없다. 그러기에 현실정치라는 용어는 긴장을 부여잡고 있기 어려운 자들의 도피적 언어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정의당의 정치는 비현실에서 현실로 돌아 온 정치라는 잘못된 분류가 아니라, 마주 보지 못했던 것을 마주 보는 정치라는 담론으로 설명해야 한다. 즉 정의당의 정치가는 통치성으로서의 권력을 늘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
입버릇처럼 진보정당의 분열을 싸잡는 이들이 많다. 그렇지만 분열을 비판하는 이들의 해법도 결코 이전처럼 다시 뭉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잘못된 것이라면 다시 합쳐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현실을 전혀 모르는 순진한 사람 취급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물체가 공간을 변형시키듯, 행위도 조건을 변화시킨다. 이미 변화된 지형 속을 움직이고 있는데, 과거의 잣대로 잴 수 없다.
정의당의 정치가에게 주어진 임무는 통치권력을 잡는 것이다. 자신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 않는 건 패배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다. 하지 않는 건 다른 일을 하는 것이다. 세상을 낫게 만드는 데 오히려 다른 일이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이 길을 간다면, 꼭 이 길을 가야 한다면,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키를 잡을 것인가?, 그 키를 제대로 움직일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이것만 생각하자.
출처: http://www.justicei.or.kr/271?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