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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

  • [칼럼] ‘정의’를 논하는 우리의 태도: ‘정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정 미 나 (진보정의연구소 전문위원)

 

우리, 소위 ‘진보’는, 해야 할 말이 너무도 많다. 특히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은 쉽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노동시장은 점점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이중화되고, 젊은 시절, 그 짧은 시기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잡지 못하면, 어쩌면 영영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 ‘비정규직’ 그 자체는 ‘직업  유연성’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정규직 위주로 짜인 우리의 복지체계는 비정규직을 빈곤의 위협에 노출 시킬 뿐이다. 정규직도 힘들다. 이윤을 높이기 위해 ‘사람’을 축소한 기업들은 ‘정규직’에게 최대의 노동을 요구한다. 어디 이 뿐인가. 대형 참사는 벌어지고, 이를 책임지는 정치주체는 찾아볼 수 없다. 아동인권, 동성애자, 여성 등 기존에 제기됐던 인권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갑을관계, 이 속에서 벌어지는 ‘정의롭지’ 못한 일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정의’를 논하는 우리의 태도는 정의에 관한 담론을 ‘확산’시키고 있는가?

나는 여기서 근래에 회자됐던 ‘싸가지 없는 진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기하는 ‘정의’의 문제는 결국 인간사회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단 이것이 공정하고 정의롭게, 특정한 집단이 특정한 집단을 억압하지 않는 방식으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도덕’이라면 도덕일 수 있겠지만, 이 도덕은 우리가 ‘먹고살만하니까’ 제기하는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억압받는 자들의 절규이고, 소외받는 자들의 울음이 담겨있는 ‘절박한 외침’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배적 정의’를 요구한다. 소수자에 대한 억압의 배제, 차별 금지를 주장하며 결과적으로 정책적 처방을 통한 시정조치와 우호 정책을 통해 분배의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한다.

 

분배적 정의가 야기하는 이해관계의 충돌, 그리고 ‘탈정치화’

그런데, 역설적으로, ‘분배적 정의’를 외칠수록, 우리가 논하는 ‘정의’의 담론은 설 자리를 잃을 수 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시정하고 교정하라는 분배적 외침은 어느 이익집단의 자기주장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정의와 규범에 관한 논의는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정치적 ‘레토릭’으로 여겨질 수 있다. 물론, 억압의 시정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분배의 문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충분하지 않으면, 분배적 정의를 요구하는 우리의 주장은,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자신의 옳음만을 주장하는 ‘독선’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 복지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의에 관한 주장이 이해관계로 치환되는 것은

정치의 핵심인 ‘숙의’의 붕괴를 의미하고 이는 곧 ‘탈정치화’를 의미한다 ”

 

저명한 페미니스트 Irish Young의 말이다. 그녀의 우려를 오히려 진보진영 스스로가 야기하고 있는 것은 닐까? 우리나라 진보진영의 담론은 정의에 관한 문제를 제기해놓고도, 이에 대한 충분한 숙의 과정, 즉 사회적 논의 과정을 간과하는 듯하다. 당위적 주장 하에 단호한 시정 조치를 요구함으로써 정의의 문제를 오히려 분배적 이슈로 한정지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배적 주장을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 ‘숙의’를 통해, 무엇이 구체적으로 이 사회의 ‘부정의’이고 ‘억압’인지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소위 진보진영이 제기하는 다양한 인간의 권리문제는 공동체 근간에 대한 진지하고, 근본적인 문제로서 다뤄질 수 있다. Young은 ‘분배적 정의’가 아닌 ‘사회적 정의’를 강조한다. 사회적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은 바로 민주주의이며, 이 속에서 ‘시민’으로서 참여해나갈 때, 이해관계나 분배적 이슈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은 단순히 ‘노동상품’이나 ‘호갱’이 아닌 ‘민주화된 참여적 대중’, 즉 상대의 주장과 그 이유(reason)를 듣고,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며 새로운 대안으로 나아가는 정치적 대중으로 역할하게 되는 것이다.

 

숙의의 한계? _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정의’

물론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숙의를 하면, ‘정의’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가능해질 것인가? 사회적 합의를 일종의 ‘사회계약’으로 본다면, 숙의 민주주의는 협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상호간에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reason)을 제공하도록 요청한다. 이를 통해 정책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에 대한 사회계약론과 숙의 민주주의는 ‘수용가능성(acceptability)’이라는 지점에서 수렴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두 가지 ‘정당성’이 충돌 할 수 있다. 정치학자 Weale에 따르면,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정당하게 획득한 삶의 보호’라는 정당성과 ‘분배의 정의로운 상태’라는 정당성이 서로 충돌한다. 가령 ‘불법체류자 아동인권’의 경우, ‘아동인권’에 방점을 찍을 경우 권리보호를 위한 지원책이 정당화될 수 있지만, 불법체류자로 인한 실업률 증가, 조세 회피, 범죄 등에 주목하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공정하게’ 받아야 할 권리 침해가 부각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숙의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결론은 최악의 상황만을 방지한 ‘최소주의적 처방’에 그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숙의의 과정을 뒤로하고, 즉각적인 ‘분배적 시정조치’에 집중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Weale은 “숙의 민주주의가 강조하는 가치는 특정 사회의 문화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결국,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성취되는, 보다 높은 수준의 정의에 대한 열망은 역사적 산물이며, 오랜 세월에 걸친 숙의의 노력이 그 사회의 문화를 만들고 이것이 결국 ‘습관화’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를 말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외치는 정의가 더 이상 ‘식상하고’, ‘꽉 막힌’ 소리로 치부돼서는 안 된다. 한국사회에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정의를 논하는 태도는 오히려 지금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한다. 특정사회에서 ‘정의’란 그 사회의 구성물임을 기억할 때, 조금 더디게 보일 지라도, 숙의하는 과정이 우선돼야 한다. 즉, 서로 질문하고, 상대의 이유를 묻고, 우리가 처한 사회에 ‘맞는’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이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가장 빠른 지름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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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usticei.or.kr/222?category=567220 [정의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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