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혁신위는 위험합니다
- 2020-06-08 11: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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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혁신위는 매우 위험합니다]
지난 금요일 정의당 혁신위원들이 추가로 선정되면서 혁신위 구성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의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겠다는 혁신위원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당 혁신위에 대한 기대는 안팎으로 크게 생겨나지 않습니다. 존재감이 크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지금의 혁신위는 위험한 지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지금의 혁신위는 총선 참패의 책임이 있는 현 지도부의 '미니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N번방 처벌만 내세우는 동안 정작 코로나민생 정국에서는 머뭇거리며 주도성을 쥐지 못한 것, 청년 대표성이 약한 비례후보가 선출될 정도로 허약한 당내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것, 과도한 할당제로 인해 대중성 있는 리더들을 배출하지 못했던 것. 그것이 심상정 지도부의 전략적 오판이라면, 혁신위는 그런 오판의 문제를 알고 있고,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들로 구성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혁신위는 자신들의 역할과 그다지 상관이 없는 과도한 할당성을 내세우는 것만으로, 혁신위원 구성의 알리바이를 채웠습니다.
가장 중요한 혁신위원장 자리는 '더 좁고 더 선명한 시각'만 강조하며, 진보정당의 역사가 만들어왔던 성공의 이유를 잘 모르는 청년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나마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기대를 모을 수 있는 인지도 있는 인사 한 명도 제대로 선출하지 못했습니다. 단적으로 비례후보 6번의 순위 박창진 후보가 왜 혁신위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납득할 지지자들이 누가 있을까 싶습니다.
지금 혁신위는 오판을 내렸던 심상정 지도부와 다른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 있고, 무엇보다 대중정당으로서의 정의당의 소명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둘째, 지금의 혁신위는 정파 세력의 담합 구조만 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정당 조직이 혁신을 말할 때는 지지자들이 실망하고 이탈할 때 뿐입니다. 때문에 혁신의 목표는 '내부 세력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민의를 더 잘 대변하는 당이 되겠다'는 것, 결국 그것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혁신위를 구성하며 내세웠던 명분은 세대교체와 독자적 정체성 구축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정의당이 젊은 정치인이 없어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이지 않은 정당이어서 지지자들이 실망했습니까. 세대교체와 독자적 정체성 구축이 지금 개혁진보시민들의 가장 추구하는 민의입니까. 즉 처음부터 혁신의 근원적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고, 혁신의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는 혁신위가 무엇을 어떻게 혁신할 수 있습니까.
대신 혁신위는 다른 과제로 핑계를 찾고 있습니다. 당대표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 대신 집단지도체제를 세우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게 대표적입니다. 지난 총선의 실패를 오로지 심상정 대표의 탓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전국위의 '이른바' 만장일치, 시도당위원장들의 합의 없이 당의 주요 의사결정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정의당이 민심을 대변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 데는 비단 심상정 지도부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전국위, 시도당위원장들, 즉 당내 주요 정파들의 암묵적 합의 탓이 큽니다.
그런데 당대표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 탈피를 핑계삼아 집단지도체제를 논의하는 것은, 당을 오판으로 몰고 갔던 정파 세력들이 당의 자리와 자원을 담합하기 더 쉬운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나마 최종 결정권자인 당대표의 리더십을 교체하여 상층을 혁신할 수 있는 여지마저 줄이는 꼴이 될 것입니다.
셋째, 지금의 혁신위는 진보의 가치에 위반되는 지향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혁신위의 엘리트주의, 검찰주의입니다. 혁신위원장이 언론을 통해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면, 중요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민의 자유는 많은 대신 평등은 부족하다'거나 '정의의 개념을 다시 정의할 때가 왔다'는 발언입니다.
이는 '올바르지 않은 시민의 자유는 제한시켜야 한다'는 함의를 갖고 있습니다. 정의당 당원이라면 이와 같은 사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차별을 발생시키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바꾸는 일보다 '차별의식을 갖고 있는 시민들을 교화' 시키는 일에 정의당이 나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자란 대중들을 찾아, 자신들의 우위를 증명하겠다는 엘리트주의입니다. 시민의 긍정적인 역할에 함께 하겠다는 진보정치의 정신에서 벗어나 시민의 잘못을 판단하겠다는 검찰주의적 발상입니다. 마치 소련식, 북한식 인민감시체제를 연상시키는 위험한 사고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대립시키며 시민들을 억압했던 우파들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이런 식의 위험한 사고가 혁신위원장의 입을 통해 언론에 나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를 다시 재정의하겠다'는 사고가 혹여 통진당 이후 노무현의 정신과 전태일의 만남이라는 정의당의 시작점마저 부정하는 일은 아닌지, 다수의 일하는 사람을 대변하는 노동자들의 당이라는 기본 정체성을 버리는 일은 아닌지 우려가 됩니다. 아마 당명 개정과 강령 개정이 논의된다면 이 우려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혁신위는 이 질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왜 이제 아무도 정의당을 구의역 김군과 고 김용균의 당으로 느끼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혁신위의 구성에서도, 혁신위의 행보에서도, 어떤 곳에서도 이 질문을 고민하는 것을 느낀 바 없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민주당 2중대론에서 벗어나고, 독자적 정체성을 확보하며, 미래 세대의 지지를 받는 길이야말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혁신위가 이 질문을 회피하고자, 여성주의, 생태주의를 차세대 진보의 정신으로 내세우고, 할당제를 강화하고, 정파 담합구조를 더 확고히 한다면, 앞으로 정의당에서 노회찬 대표처럼 대중의 언어로 소통하며 다수의 국민들에게 인정받는 새로운 리더가 나타날 길은 없을 것입니다. 정의당이 한국 정치에 존재할 이유를 더 줄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혁신위가 정의당의 혁신을 도리어 가로막는 곳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